카이사르 - 갈리아 전쟁기, 내전기. 책.

갈리아 전쟁기 - 8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사이

카이사르의 내전기 - 8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사이


카르사르는 어떻게 영웅이 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닌 그의 육성을 직접 듣고 싶었다.

1.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44) 연보
동시대 인물 : 사마천(BC 145~86), 크라수스(BC 115~53), 폼페이우스(BC 106~48), 소 카토(BC 95~46), 마르쿠스 브루투스(BC 85~42), 안토니우스(BC 83~30), 헤롯대왕(BC 73~4), 베르길리우스(BC 70~19), 클레오파트라(BC 69~30), 옥타비아누스(BC 63~AD 14)

BC 86년(14세) 민중파인 고모부 마리우스의 후광으로 사제직에 선출
BC 82년(18세) 독재관 술라의 압력에 소아시아로 도피
BC 78년(22세) 로마로 돌아와 변호사로 개업, 키케로에 참패해 참담한 실패
BC 76년(24세) 해적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었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 해적을 소탕하고 모두 처형했다.
BC 74년(26세) 제사장 선출
BC 69년(31세) 재무관 선출, 히스파니아 파견
BC 65년(35세) 안찰관 선출
BC 63년(37세) 최고 제사장 선출
BC 62년(38세) 법무관 선출
BC 61년(39세) 히스파니아 남부 총독
BC 60년(40세)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제1차 삼두동맹 결성
BC 59년(41세) 집정관 선출
BC 58~50년(42세~50세) 갈리아 속주 총독, 갈리아 전쟁 수행, 게르만인, 브리타니아 섬 침공
BC 49~48년(51세~52세) 폼페이우스와 내전, 디라키움 공방전 패배, 파르살루스 전투 승리, 알렉산드리아 전쟁, 클레오파트라 이집트 왕위 등극
BC 47년(53세) 소아시아 파르나케스 격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독재관 임명
BC 44년(56세) 종신 독재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우려한 공화당 지지파들에 의해 암살

2. <갈리아 전쟁기>, <내전기>의 시대적 배경
<갈리아 전쟁기>는 BC 58년부터 BC 52년 까지 갈리아, 게르만, 브리타니아 지역 전쟁을 기록한 것으로 BC 51년(49세)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출판으로 카이사르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으며 어쩌면 이러한 사실이 내전을 앞당겼을 수도 있다. 마지막 8권은 카이사르가 죽은 후 그의 부하이자 친구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덧붙인 것이다. <내전기>는 BC 49년부터 BC 48년까지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기록한 것이지만 언제 완성되어 출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3. 책의 서술 방법
이 책은 총사령관으로 참가한 정치가이자 군인인 한 로마인의 회고록이자 자서전이요, 여행기이자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책의 곳곳에서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같은 그리스 역사가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자신을 3인칭으로 기술해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높히는 서술 방법은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서 먼저 사용되었다. 한 부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그 부족의 풍습이나 지리, 기후, 종교 등을 기술하는 방법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의 영향을, 게르만인의 검소함과 갈리아인의 사치스러움을 비교하는 장면에서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4. 책의 내용과 기억에 남는 부분

<갈리아 전쟁기>
제1권 기원전 58년, 카이사르 42세, 갈리아 전쟁 1년째
침입자 헬베티족과의 전쟁
1:14 불멸의 신들이 항상 벌 주려 하는 자들에게 잠시의 성공과 무사함을 허락하는 이유는, 운이 다했을 때 그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기 위함이다.
게르만인 아리오비스투스와의 전쟁
1:40 과거를 돌이켜볼 때 군대가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경우는 지휘관이 행운으로부터 버림받아 전장에서 패했을 때나, 그의 범죄나 탐욕스런 행위가 밝혀졌을 때이다. 카이사르의 결백함은 그의 전 생애가 입증하는 바이며, 그의 전운 또한 헬베티족과의 전투에서 명백히 입증되었다. [게르만군에 대한 공포에 질린 병사들을 향한 연설]
제2권 기원전 57년, 카이사르 43세, 갈리아 전쟁 2년째
벨가이 정복
2:11 따라서 아군은 아무런 위험도 겪지 않고 오랫동안 수많은 적을 살해할 수 있었다.
2:25 네르비족과의 전투
전력보강마저 불가능한 위태로운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방패를 두고 왔기 때문에) 후방의 한 병사로부터 방패를 빼앗아 들고 최전으로 나아갔다.... 카이사르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희망과 용기의 불씨를 되살렸다.
2:28 네르비족 사절들은 부족에게 몰아닥친 불행을 설명하면서, 600명의 원로가 3명으로 줄었고 싸울 수 있는 남자의 수도 6만 명에서 단 500명으로 줄었다고 선언했다.
제3권 기원전 56년, 카이사르 44세, 갈리아 전쟁 3년째
알프스 산악 부족과의 전투
3:2 로마군이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점령한 것은 단지 통행을 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은 그들을 영원히 지배하고 프로빈키아에 인접한 영토를 합병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었다.
베네티족과의 바다에서의 불리한 전투
3:10 카이사르는 ...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유를 갈망하고 예속 상태를 싫어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보다 많은 부족들이 공모에 가담하기 전에 병력을 나누어 여러 곳에 배치했다.
부하 장교들의 승전보
3:26 아퀴타니아와 칸타브리아에서 집결한 5만 명의 군사 중 살아남은자는 4분의 1에 불과했다.
모리니족 답사
제4권 기원전 55년, 카이사르 45세, 갈리아 전쟁 4년째
게르만인과의 살육전
4:1 수에비족은 게르만인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공격적이다.... 토지를 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소유하지 않으며, 한 곳에 일 년 이상 거주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추운 지방에서도 짐승 가죽 외에는 어떤 것도 몸에 걸치지 않으며, 그나마 몸에 걸친 가죽도 아주 작아서 대부분의 신체가 그대로 노출된다. 뿐만 아니라 추운 날에도 강에 들어가 목욕을 한다.
4:5 카이사르는 갈리아인의 변덕스런 성격을 염려했다. 그들은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늘 정권이 변하기를 갈망한다. 또한 카이사르는 어떤 경우에도 갈리아인의 말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4:7 우리는 불멸의 신들조차 대적하지 못하는 수에비족에게만 굴복했을 뿐, 지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인강을 넘어온 게르만인]
최초의 라인강 도하
브리타니아 상륙 작전
제5권 기원전 54년, 카이사르 46세, 갈리아 전쟁 5년째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5:7 카이사르가 있을 때 그의 명령을 무시하는 자는 카이사르가 없을 때에도 분별 있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소환 명령을 받은 둠노릭스는 무력으로 저항하면서 지지자들에게 충성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고 자유로운 국가의 시민이다."라고 게속해서 외쳐댔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그를 에워싸고, 죽였다.
5:12 헤로도토스의 영향,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다가 갑자기 브리타니아의 풍습과 지리적 환경, 생활 방식등을 소개하고 있다.
로마군 최대의 참사(사비누스-에부로네스족 암비오릭스)
5:37 아군 병사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가 질 때까지 전투를 게속했지만, 날이 어두워지자 희망을 포기하고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네르비족의 총공격
5:44 티투스 풀로와 루키우스 보레누스 [드라마 Rome의 주인공들]
5:52 카이사르는 ... 병사들이 용감히 싸운 덕분에 적을 물리치고 패배를 만회했으므로, 한 부장의 과오로 일어난 이 손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이제 적에게는 축하할 이유가 사라졌고, 아군에게는 슬퍼할 이유가 사라졌다.
갈리아인들의 음모
제6권 기원전 53년, 카이사르 47세, 갈리아 전쟁 6년째
트레베리족의 반란
제2차 라인 강 도하
갈리아의 풍습과 제도
6:11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의 풍습, 두 민족의 차이 [헤로도토스의 영향]
6:15 어떤 부족들은 거대한 신상을 만들고 고리버들로 엮어 만든 신상의 팔과 다리에 산 사람들을 가득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 신상에 불을 붙여 산 사람들을 그대로 화형시킨다. 갈리아인들은 도둑이나 강도 또는 그 밖의 범죄자들을 이런 식으로 처형하면 신들이 더욱 기뻐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마땅한 범죄자가 부족할 때는 무고한 사람들을 붙잡아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게르마니아의 풍습과 제도
6:24 게르만인과 똑같이 음식을 먹고 똑같이 옷을 입으며, 그들과 똑같이 가난과 궁핍과 고난을 견디며 산다. 반면에 갈리아인은 프로빈키아에 가까이 살아 수입품에 익숙하며 사치스럽고 편리한 생활를 누린다. 그들은 많은 전투에서 패하는 동안 점차 패배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들 자신이 용맹함에 있어서는 게르만인과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투키디데스의 영향]
암비오릭스 추격
6:30 모든 일에서, 특히 군사적인 문제에서는 운이 매우 중요하다.
6:35 이 모든 일에서 운이 전쟁에 얼마나 큰 작용을 하고, 얼마나 큰 변화를 몰고 오는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6:42 불운이 닥칠 수 있는 기회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허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제7권 기원전 52년, 카이사르 48세, 갈리아 전쟁 7년째
갈리아 대반란의 조짐 - 베르킨게토릭스
7:1 마지막으로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명예와 자유를 회복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는 데에 동의했다.
아바리쿰 점령
7:14 이 제안이 가혹하게 들린다면, 그대들의 자식과 아내가 노예로 끌려가고 그대들 자신이 살해되는 것은 훨씬 더 불행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에서 진다면 틀림없이 그런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7:26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공포가 동정심을 가로막기 때문에 남자들은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려 했다.
7:28 아군은 단 한명도 전리품을 생각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모두 케나붐의 학살과 기나긴 공성 작전에 크게 분노한 터라 노인도, 여자도, 심지어 어린 아이도 살려주지 않았다. 결국 약 4만 명 중에서 800명만이 간신히 베르킨게토릭스의 진지로 도망쳤다.
게르고비아에서의 패배
7:52 카이사르는 지형상의 이점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고,... 적의 진지를 점령하고 높은 산과 성벽을 단숨에 돌파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승리와 결과에 대해 총사령관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 것은 무례하고 오만한 행위로,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고 혹독하게 나무랐다.
갈리아 총반란, 하이두이족 변절
7:78 갈리아인들은 ... 나이가 많거나 병에 걸려 쓸모없는 자들을 도시 밖으로 내보내는 등 우선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로마군 진지로 몰려와 눈물을 흘리면서 식량을 나눠 줄 것과 자신들은 노예로 받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방벽의 경계를 강화했다.
알레시아 공방전
제8권 기원전 51년, 카이사르 49세, 갈리아 전쟁 8년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서문(제8권은 카이사르의 친구이자 참모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썼다.)
갈리아 평정을 위한 전투
갈리아 최후의 전투
임박한 내전

<내전기>
제1권 기원전 49년, 카이사르 51세, 내전의 시작
로마 안에서의 음모
카이사르의 반격
1:9 나에겐 언제나 명성이 목숨보다 중요했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오.
코르피니움 정복
1:21 전쟁에서는 사소한 일들이 종종 크게 확대되어 엉뚱하고 심각한 결과를 낳는 법이다.
폼페이우스, 로마를 탈출하다
1:28 브룬디시움의 시민들은 그들을 버리고 떠난 폼페이우스 군대의 비겁한 행동과 폼페이우스 자신의 모욕적인 행동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카이사르 편으로 돌아섰다.
로마, 무혈입성하다
마실리아의 전운
일레르다, 카이사르를 고립시키다
브루투스의 해전 승전보
카이사르의 승리, 히스파이나 전투
1:72 아무리 승리를 위한 것이라 해도 왜 카이사르가 쓸데없이 그의 병사들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 훌륭한 사령관이라면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작전으로 더 큰 승리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2권 기원전 49년, 카이사르 51세, 승리와 패배
마실리아 공성전
2:4 인간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지나친 자신감이나 두려움을 품게 되는 오류를 범하는데, 이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히스파니아 최종 장악
마실리아, 백기를 들다
쿠리오의 아프리카 전투
2:29 내전에 참가한 병사들은 자유롭게 행동해도 괜찮으며, 어느 쪽 편을 들어도 정당하는 것이 병사들의 생각이었다.
2:31 쿠리오는 두 의견에 모두 반대했다. 하나는 무모했고 다른 하나는 나약했다. 한쪽은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이려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굴욕적인 도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쿠리오의 죽음, 패배의 시작(쿠리오 vs 사부라, 유바 왕)
2:38 그의 젊음, 그의 용기, 지금까지 거둔 승리, 그리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이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
2:41 아군 병사들은 희망을 버렸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가 그러하듯이 어떤 병사들은 자기 연민에 빠졌고, 또 다른 병사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바라면서 행여 살아남은 자가 있으면 자신의 가족들을 돌봐 달라고 외쳤다. 두려움과 슬픔이 모든 병사를 사로잡았다.
2:42 이제 완전한 절망에 사로잡힌 병사들은 도주를 시도하다 적의 기병에게 살해되었고, 어떤 병사들은 부상을 입지않았음에도 스스로 땅바닥에 몸을 내던지곤 했다.... 그러나 [2만 명에 달하는] 보병은 모두 살해되었다.
제3권 기원전 48년, 카이사르 52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격돌
전쟁을 준비하는 폼페이우스
에피루스 회담
카일리우스의 반란
안토니우스의 시련
마케도니아의 부정들
다라키움 공방전
카이사르의 작전, 실패하다
3:61 이것은 처음 있는 특별한 사건이었다.... 병사들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카이사르 진영으로 넘어오는 사건은 매일 발생했지만, 보병이든 기병이든 카이사르의 진영에서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탈주한 자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3:68 그러나 막강한 위력으로 전쟁의 모든 면을 좌우하는 천운은 종종 극히 사소한 일로 인해 급격히 반전된다.
3:69 먼저 뛰어내린 병사들은 다음에 뛰어내린 병사들에게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아군 병사들도 오직 위험을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똑같이 뛰어내려 동료들의 시체 위로 떨어졌다.... 모든 곳이 소란과, 공포와, 패주하는 병사로 가득했다.
3:72 적은 마치 그날의 승리를 그들 자신의 용맹함으로 쟁취했으며, 따라서 역전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온 세상에 소문을 내고 급보를 보냈다.
3:73 본인은 유리한 지형에서 싸울 기회를 만들었고, 적의 진영을 점령했으며, 우세한 전투로 적을 몰아붙이고 제압했다. 그러나 그대들의 동요 때문이었었는지, 그대들의 실수 때문이었는지, 혹은 운명의 손길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다 잡은 승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따라서 이제는 그대들의 용맹함으로 패배를 만회하는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 테살리아로 가다
품페이우스의 추격
3:83 모든 자들이 자신의 직위나 경제적 보상을 선점하기 위해 또는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데 혈안이 되어 승리를 얻을 방법보다는 승리를 이용할 방법에 골몰했다.
최대의 결전, 파르살루스 대전투
3:92 전의에 불타는 병사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상당한 열정과 용맹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총사령관은 그 열정과 용맹함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북돋워야 한다.
3:96 폼페이우스의 진영에는 군데군데 수목을 심어 그늘을 만들었고, 식탁 위엔 육중한 은 식기가 놓여 있었으며, 막사 안에는 파릇파릇한 잔디가 깔려 있었고, 루키우스 렌툴루스를 비롯한 몇몇 지휘관의 막사는 담쟁이 잎으로 덮여 있는 등 사치스런 낭비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이렇듯 모두가 일신의 편안함을 추구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전투의 결과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페르시아 전쟁 플라타이아이 전투 연상]
3:99 폼페이우스 군대에서는 약 1만 5,000의 병사가 쓰러졌지만 항복한 병사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은 2만 4,000명 이상이었다.
폼페이우스의 최후
3:105 카이사르의 동상을 모시고 있던 트랄레스의 빅토리 신전에서는 거리의 포석 사이에서 자라던 야자나무가 며칠 동안 신전 안으로 가지를 뻗는 일이 발생했다. [헤로도토스의 영향, 신의 호의를 보여주는 기록]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3:111 카이사르는 적은 병력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지킬 수 없었으므로 부두에 정박해 있는 적군 함선 50척을 모두 불태운 후 서둘러 그의 병사들을 파로스로 이동시켰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함께 불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3:112 파로스 섬에는 경탄할 만한 건축물이자 그 섬의 이름을 따 <파로스>라 불리는 매우 높은 등대가 서 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5. 코멘트

모든 역사문헌들 중에서도 가장 영악한 일방적 설명
 - H.E.반스, 서양사학사, p.57

위 글이 카이사르의 두 책에 대한 가장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책의 사료적 가치는 논외로 하고, 책의 정치적 목적만 살펴본다면, 역사상 어떤 프로파간다 문서도 하지 못한 것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책에서 묘사되는 카이사르는 지략, 위엄, 자비, 절제, 용기 등 정치가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지니고 있다. 당시 로마인들은 '명예'를 가장 중요시했으며, 국가를 위한 전투에 참가해 명성을 갖춘 후에야 정치가로서 나아갈 수 있었다.  카이사르와 카이사르의 부하로 갈리아 전쟁에 참가한 푸블리우스 크라수스(크라수스의 아들), 퀸투스 키케로(키케로의 동생)도 명성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통해 명성을 얻었고, 그 결과 가장 높은 자리에 이를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왜 계속해서 전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은 없다. 그것이 이 책의 한계다. 책에서 모든 전쟁의 원인은 타 부족에게 있고, 카이사르는 마지못해 모든 전쟁에 임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모든 인간이 자유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복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통해 100만 명 이상을 살육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역을 평정했다고 하지만 로마는 이민족의 침입에 끊임없이 시달리다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100만 명 이상을 죽이고서 카이사르가 얻어낸 것이 단 3년 간의 로마의 독재관 자리였을 뿐이라면 과장일까? 자비로운 강자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자비로운 강자가 아예 필요없는 세상이 더욱 좋을 것이다. 이 점에서 갈리아 전쟁에서는 그보다 갈리아인들의 자유를 위해 카이사르에 맞섰던 베르킨게토릭스가 더 영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카이사르의 영웅다운 모습은 그가 약자였던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엿볼 수 있다. 폼페이우스보다 약세인 군대를 가지고 우여곡절 끝에 승리하여 자신의 명예를 지켜내는 모습은 매력적이다. 그 후 죽기 전까지 로마인들을 위해 펴나간 정책들도 훌륭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단지 로마에만 이로웠다는 것이 아쉽다.

P.S. 
1. 루비콘 강을 건너 반역자가 되는 카이사르, <내전기>에는 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침내 카이사르는 심사숙고하기를 그만두고 자신을 운명에 내맡기는 양 일종의 격정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절망적인 모험을 감행하기 전에 흔히 내뱉곤 하던 "주사위는 던져졌다(anarrhiphtho kybos)"는 말을 남기고는 서둘러 강을 건넜다.
- 플루타르코스, 천병희 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카이사르전, 32장

2. 카이사르가 소아시아에서 파르나케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카이사르는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신속했는지 알리기 위하여 로마에 있는 친구 아만티우스에게 서찰을 보내며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elthon, eidon, enikesa)"라는 세 마디 말만 적었다. 그러나 로마 말로는 이 말들이 모두 어미가 같아서 인상적인 간결미를 느끼게 해준다.
- 플루타르코스, 천병희 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카이사르전, 50장

3.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바로 그 말

내 아들아, 너마저? (kai su, teknon?)

브루투스여, 너마저? (Et tu, Br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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