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제1강 세계사의 주축이 변하고 있다 (2011년 9월 5일 월)
19세기 유럽문명의 주축성은 20세기 미국에서 꽃피웠다. 지금 20세기 미국의 패러다임이 중국으로 가고 있다. 우리문명은 이러한 흐름을 선취하여 인류의 새로운 이상을 구현해야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거대한 포부를 가져라! 꿈을 키우자!

제2강 공자와 그의 손자 자사 (2011년 9월 6일 화)
사서는 그 모습대로 중국고대경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12세기 송나라의 주희가 외래종교인 불교에 대하여 주체적 철학을 회복하기 위하여 만든 유교운동의 새로운 경전이다.<중용>은 그 사서 중의 하나로서 유명해졌는데, 그것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은 것이 확실하다.

제3강 천명이란 무엇인가? (2011년 9월 12일 월)
인간의 본성은 근원적으로 선하다, 악하다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규정성은 모두 종교적 구원론을 전제로 한 픽션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자사는 인간의 성에 대한 모든 규정성을 거부했다. 인간의 성은 천지와의 끊임없는 교섭의 과정일 뿐이다.

제4강 칸트와 붕어빵 - 한국 젊은 지성의 흥기 - (2011년 9월 13일 화)
칸트철학은 서구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인 동시에 근대적 인간에 대하여 명백한 한계를 부여하였다. 인간의 위대성과 인간이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밝혔다. 지금 한국사회는 젊은 학도들의 학문적 업적이 비약적으로 축적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자신의 철학을 창조해야할 시점에 왔다. 조선의 젊은 학도들이여! 분발하라! 노력하라! 창조하라!

제5강 이성과 감정 (2011년 9월 19일 월)
<중용>은 인간의 본성을 가치론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모든 일시적 규정성은 허구다. 인간의 삶은 과정이다. 과정이란 끊임없는 수도의 세계이다. 수도는 결국 몸의 닦음이다. 나의 몸Mom이야말로 나의 하나님God이다. 젊은이들이여! 그대의 몸을 경배하라!

제6강 중中과 화和 (2011년 9월 20일 화)
예수는 은미를 하늘나라의 비밀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사는 은미를 인간의 고독한 실존의 깊이로 파악했다. 그 깊이에서 우리는 미발의 중을 만난다. 그러나 중은 반드시 화로 발전해야 한다. 교육의 목표는 감정의 조화를 달성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남북을 화해시키고 정치.종교.사회의 모든 갈등을 화로 만들자!

제7강 신독愼獨이란? (2011년 9월 26일 월)
신독이란 나의 존재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나 홀로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신독은 끊임없는 주체의 심화이며, 위성의 길이며, 수신의 도이다. 유교는 천지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젊은이들이여! 신독하라! 그리고 인간과 우주의 조화를 달성하라!

제8강 군자와 소인 (2011년 9월 27일 화)
인간의 모든 세계는 관의 지배 속에 있다. 우리는 수리적 법칙이 지배하는 서구 과학적 세계관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세계관은 아니다. 다양한 관에서 다양한 세계가 태어난다. 군자와 소인은 보편적 인간관을 전제로 한다. 중용을 실천하면 군자가 되고 중용에 반하면 소인이 된다. 조선의 젊은이들이여! 소인이 되지 말고 군자가 되자! 중용의 인간이 되자!

제9강 시중, 타이밍의 예술 (2011년 10월 3일 월)
천지코스몰로지Tian-Di Cosmology는 서양과학에 양보할 수 없는 하나의 유니크한 세계관으로서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지닌다. 천.지.인 삼재는 나의 몸속에 융합된다. 동방의 지혜는 시간 속에서 중을 구현하는 것이다. 범용의 일상이야말로 성인이 되는 길이다. 명심하자! 인생은 타이밍의 예술!

제10강 교육의 리듬과 능구 (2011년 10월 4일 화)
교육은 리듬이다. 따라서 교육의 과정은 일률적인 강요가 아니라 리드미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주입과 자유는 상호보완의 관계이다. 주입교육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대학교육은 자율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교육의 핵심은 지구력의 배양에 있다. 그것이 <중용>에서는 “능구能久”의 문제로 나타난다.

제11강 능구와 삼개월 (2011년 10월 11일 월)
유교는 종교적 신념이나 과학적 세계관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유교의 핵심은 “사람되기”를 배우는 것, 타고난 천명을 최대한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부며 수신이며 시중이며 능구이다. 모든 발현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삼 개월만 철저히 실천해도 성인의 길은 눈앞에 보인다. 청춘이여! 삼 개월을 능구하라!

제12강 지미(知味) (2011년 10월 12일 화)
지식과 지혜는 이원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지식이 없는 것이다. 중용은 과.불급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맛을 아는 것이다. 맛은 감성과 이성을, 필연과 자유를, 과학과 도덕을 통합한다. 맛은 멋이다. 멋은 우리 몸의 궁극적 도덕성이다. 조선의 학도들이여! 맛을 아는 멋있는 인간이 되자!

제13강 공포와 우환 (2011년 10월 18일 월)
공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다고 깊은 탄식을 발한다. 유교에서는 이러한 탄식을 우환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의 죄업과 불교의 고업과 구별되는 이 우환의식은 성인이 되기 위한 배움을 지속하는 한, 나의 몸으로부터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수신은 반드시 오륜, 즉 사회적 구원의 지평 위에서 실현된다. 조선의 젊은이들이여! 대인의 우환의 마음을 잃지 말자!

제14강 묻기를 좋아하시오 (2011년 10월 19일 화)
서양철학의 대세는 인식론이다. 그리고 서양종교의 주지는 인간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는 인간을 철저히 긍정한다. 서양은 선과 미도 진에 복속시켰다. 대지의 일차적 덕성은 호문이다. 호문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타인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하여 물었지만 공자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서 물었다. 조선의 젊은이여! 물어라! 무엇이든지 물어라!

제15강 나는 과연 지혜로운가? (2011년 10월 24일 월)
동방사상에는 선과 악에 대한 실체적 규정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개념을 실체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명사가 아닌 형용사이다. <중용> 제7장에 대한 나의 해석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인품과 생애의 사건을 훑어보면 나의 해석은 너무도 정당하다. 이 파편은 자신의 부족을 탓하는 공자의 독백이다. 그의 정직한 실존적 독백 때문에 동아시아문명은 신화적 질곡에 빠지지 않았다. 공자는 위대하다.

제16강 인간 공자 (2011년 10월 25일 화)
공자의 메시지는 항상 중층적이다. 그리고 자신을 항상 겸손하게 낮춘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예수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이다(요 14:6).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인간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보통사람의 일상적 분발을 격려한다. 인간은 지(知).인(仁).용(勇)의 전인적 인격을 구비해야 한다. 이 땅의 깨인 사람들아! 정확히 알고, 섬세하게 느끼고, 용맹스럽게 정의를 외치자!

제17강 안회의 삶과 죽음 (2011년 10월 31일 월)
선이란 본시 명사가 아니다. 좋다, 착하다, 잘 돌아간다는 사태의 기술일 뿐이다. 칸트는 인간의 선의지의 발현을 정언명령이라는 형식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자사는 구체적 일선에 즉하여 그러한 정언명령에 도달하려 했다. 선은 원리가 아닌 구체적 실천이다. 안회는 이러한 선을 철저히 실천했다. 공자가 안회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을 배우자!

제18강 백인가도 (2011년 11월 1일 화)
시퍼렇다 못해 하이얀 칼날도 인간은 맨발로 밟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용은 실천하기 어렵다. 인간의 진정한 용맹은 중용을 실천하는 데 있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파지” 철학으로 비폭력저항운동을 이끌어 근대적 인도를 만들었다. 우리의 동학도 인내천사상으로 개벽의 조선을 꿈꾸었다. 이런 꿈이 지금 한국 젊은이에게 있는가? 깨어나라! 한얼아!

제19강 강(强)함이란? (2011년 11월 7일 월)
공자는 인간의 강함에 남방지강과 북방지강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남방지강의 대표가 노자사상인데 인류의 근대에 와서는 소로의 시민불복종권리의 철학이 되었다. 이것은 톨스토이.간디.마틴 루터 킹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북방지강의 대표로서는 몽골의 세계지배를 들 수 있다. 우리 한국민족은 남.북방의 용기를 다 가지고 있다. 진정한 평화는 남.북방의 용기를 포섭하는 강인함을 통해서만 이룩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무용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지켜야 한다.

제20강 자로의 인생역정 (2011년 11월 8일 화)
공자의 삶은 그 자체로서 인류사에 최초로 “사士”의 전범을 “작作”한 삶이었다. 무인 기질의 자로가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로 변해간 역정이라야말로 인문정신의 승리였다. 자로는 선비로서 살고 선비로서 죽는다. 인간의 진정한 용기의 모습은 “화이불류和而不流”에 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한 시절의 정의감을 변치 않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를지언정 절개와 지조를 변치 아니 한다. 인간의 진정한 강함은 중용의 실천에 있다.

제21강 중도에 그만두지 않는다 (2011년 11월 14일 월)
한문은 미래 세계를 리드하고자 꿈꾸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필수의 교양이다. 최소한 4서3경은 마스터해야 한다. 공자는 색은행괴하여 인류사에 이름을 휘날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군자는 정도의 길을 걸어갈 뿐,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다. 은둔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도 후회함이 없다. 은둔은 군자의 특권이며 소인배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한국의 청년들이여! 언제든지 비룡이 될 수 있는 잠룡이 되자!

제22강 본체와 현상, 체體와 용用 (2011년 11월 15일 화)
서양철학사는 본체와 현상의 이원론이라는 마당 구조 위에서 전개된 지적 유희이다. 본체와 현상을 픽션으로 보고 본체만이 실재한다고 본 것은 매우 유치하다. 동방의 사유는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군자의 도는 본체(은隱)와 현상(비費)를 다 포섭한다. 군자의도는 오륜이라는 관계를 통하여 실현되는데 부부의 도가 가장 본질적이다. 부부의 관계는 중용의 샘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동방사상은 남녀의 온전한 평등을 말한다.

제23강 어약우연魚躍于淵 (2011년 11월 21일 월)
모든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다. 창조는 일시에 세상을 만드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창조는 영원한 지속이며, 엘랑 비탈의 도약이다. 동방인은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의 창조력Creativity 그 자체를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창조의 핵심은 부부의 도이다. 부부의 결합이야말로 오륜의 모든 관계를 창조한다. 자사는 인류고대사상에 있어서 유일하게 일부일처제에 입각한 평범한 부부관계를 성聖Das Heilige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음양에는 우열이 없다. <중용>은 페미니즘의 성경이다.

제24강 사랑의 역설 (2011년 11월 22일 화)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는 제13장의 메시지는 “도야자道也者, 불가수유리야不可須臾離也”라는 제1장의 총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공자사상의 핵심은 충忠에 있지 아니하다. 그것은 서恕 한 글자로 집중된다. 서恕는 긍정형이 아닌 부정형이다. 윤리적 명제는 부정형이라야 진정한 보편명제가 될 수 있다. 부정은 인간의 맛이며 멋이며 여백이다. 젊은이들이여!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지 말자! 이것은 우리 전통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최대의 역설이다.

제25강 언言과 행行 (2011년 11월 28일 월)
지렁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길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행동에 앞서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때가 많다. 인간의 문명은 언어와 더불어 시작하였다. 언어는 문명에 모든 가능한 생명력과 추동력을 부여했지만 인간의 운명에 비극성을 부여하였다. 언행일치는 말과 행동의 일시적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은 서로를 보완해가면서 서로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변증법적 관계항들이다. 말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며 행동은 말을 고양시킨다. 도가는 언言을 부정한다. 유가는 언행言行의 변증법을 말한다.

제26강 부귀富貴와 사문斯文 (2011년 11월 29일 화)
공자는 부富를 얕잡아 보거나 천박한 가치로서 배제하지 않는다. 부귀와 빈천은 인간에게 있어서 잠정태일 뿐 영속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부귀에 있을 때 부귀에 합당한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느냐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카네기의 삶을 통해 "부의 복음"의 실천사례를 보았다. 한국의 부자들은 더 명철한 공적 가치에 헌신해야 한다. 사문斯文만이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다. 과연 한국의 젊은이들은 사문을 그 몸에 지켜가고 있는가?

제27강 등고자비登高自卑 (2011년 12월 5일 월)
나의 실존적 행위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로 돌아간다. 유교적 실존은 내세를 전제하지 않는다. 오직 수신의 현세가 엄존할 뿐이다. 군자의 도는 활쏘기와도 같다.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그 잘못의 이유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먼 곳은 가까운 데서, 높은 곳은 낮은 데서 나아간다. 하학하여 상달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례를 우리는 안중근의 삶에서 본다. 안중근은 동양평화의 거시적 비전과 그 비전을 구현하는 놀라운 실천력을 지닌 거인이었다. 한국의 청년들이여! 안중근의 고매한 이상, 그 맛과 멋을 배우자! 청춘은 혁명!

제28강 귀신鬼神 (2011년 12월 6일 화)
“귀신鬼神”은 고스트와 같은 유령이 아니다. 귀신은 실체적 사고로 접근되어서는 안 된다. 귀는 땅의 기운이며 신은 하늘의 기운이다. 땅과 하늘이 만나 생성되는 만물은 모두 귀신이라 말할 수 있다. 귀신이란 우주의 끊임없이 진행되는 창조력 그 자체이다. 공자는 반드시 신(하늘)에 대한 제사와 더불어 귀(땅)에 대한 제사를 같이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배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땅을 경배할 줄 알아야 한다. 도시를 사랑할 줄 안다면 농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귀신장에서 최초로 “성誠”이 언급된다. “성誠”은 “성聖”이다. 우리는 일상적 “성실함”의 우주론적 함의를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제29강 대효大孝 (2011년 12월 12일 월)
유기체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종말을 맞이한다. 유기체는 생멸의 유한성을 생식으로 극복한다. 유한한 생명의 연속은 무한을 확보한다. 그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귀신이고 효孝이다. 효는 결코 협애한 인간세의 덕목이 아니다. 인간 존재이 기저를 형성하는 언어 이전의 근원적 체험이다. 효의 주체는 자식이 아니라 부모이다. 엄마의 절대적 사랑이야말로 효의 실내용이다. 모든 신성Holiness의 원초적 아가페가 엄마이다. 엄마는 오이디푸스와 무관하다. 엄마를 경배하라!

덧글

  • 호근 서당 2020/12/31 05:36 # 삭제 답글

    감사 합니다. 아산 선생님께 중용 수업 시간에 도올선생님 . 이야기를 많이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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